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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송찬호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행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 쓰다만 시 - 쓰다만 시가 너무 많지 않나 다 쓴 시를 찾기가 어렵다 불에 덴 것처럼 끝맺음도 바로 그렇게 알 수 있다면 그랬으면 지나간 시를 고쳐 쓸 일도 없었겠지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백은선 - 비밀과 질문 비밀과 질문 - 책 속에서 출렁이는 물을 만났어 몰캉몰캉한 젤리들이 눈속으로 가득 쏟아졌어 이렇게 고요한 밤에 어떻게 나는 숨을 쉬고 말을 할 수 있을까 불속에서 녹아내리는 몸 줄곧 가지고 다닌 비밀과 질문 정말이라면 그것이 정말이라면 물은 까맣고 까만 것은 무한하기에……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을 비밀과 질문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쉽고 가벼워지는 그것을 어쩔 줄 모르고 공중에 놓여 있던 두 손이라 부를 수 있다면 주머니가 있어 손을 감출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은 형상을 바꾸며 나아갔고 나아가며 멈춰 있었고 물무늬가 그리는 파동이 겹겹이 흔들리며 얼굴을 짓뭉개놓는 동안 울면서 울면서 달리고 달리는 커다란 기차를 생각했어 기차를 끌어당기는 은빛 선로에 대해 생각했어 그 안에 가득찬..
감(感)에 관한 사담들 윤성택 - 기억 저편 - 한 사람이 나무로 떠났지만 그 뒷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어느 날 나무가 되어 돌아온 그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그때 이미 떠난 그였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떠난 그가 남긴 유품을 새벽에 깨어 천천히 만져보는 기분, 길을 뒤돌아보면 그를 어느 나무에선가 놓친 것도 같다 나는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 살아간다는 건 온 신경을 유목한다는 것이다 그가 떠난 자리에 잠시 머물면서 이렇게 한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 여행 혹은 기억 - 떠난 적 없지만 떠날 수 있음을 안다 늘 어디론가 가버리는 붙잡고만 싶은 누구에게나 있는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이병률 - 오시는 마을 - 새로 지은 마을로 사람들이 이사를 합니다 마을 입구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생각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둥근 마을의 경계에는 화살나무를 둘러 심고 유성이 도착하도록 꽃밭을 파놓습니다 상자에 담아온 시간들은 천천히 씻겨도 좋을 것입니다 어느 저녁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합니다 분수대를 가운데 둔 듯 동그랗게 모여 앉았습니다 소개는 즉흥적이며 아무도 질문하지 않습니다 데인 자국을 이야기하는 사람 물에 휩쓸린 기억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두 바퀴의 소개가 돌았지만 자신의 깊숙한 곳까지를 소개하느라 생각의 면적을 줄이기 위해 계절을 하나로 통일시키자는 안건은 모두 잊은 듯합니다 함부로 내일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무서워할 것들을 수군..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김희준 - 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 -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자 태양의 궤도를 따라간다 북회귀선에서 손을 놓친 아이 블랙홀에 쓸려간 아이 극대기에 길을 잃지 않으려면 눈을 감아야 해 그날 손을 놓친 건 지구로부터 몸을 버리러 온 밤이었기 때문, 천진하게 떨어지는 아이는 무수한 천체가 되지 갈림길은 아이를 먹어치운다 사라지는 게 길이라면 해방된 아이를 묻지 않는 게 좋겠어 때때로 스펙트럼 행성에선 그리운 사람을 한평생 쓸 수 있는 이름이 내린다 편지 받았니? 국지성 문장이 쏟아진다 이마에 부딪히는 눅눅하고 달콤한 언어 이름은 아이가 되거나 아이들이 되었다 다정하게 내리는 것은 제철 햇볕을 닮아서이다 꺼내지 못한 말은 무지개에서 색을 내고 있었다 거짓말을 못하는구나 사탕 봉투에서 ..
없음의 대명사 오은 - 우리 - 뭐 하지? 백주에 만나니 어색하네. 백주라니, 책에서 튀어나온 단어 같잖아. 낮에 뜬 별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어디에 박힐지 골몰하는 눈치였다. 훤한 대낮이라고 말하면 빤하다고 할 거면서. 둘 다 낮달처럼 스스러웠다.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여기가 그렇게 맛있대. 그런데 왜 사람이 없어? 지금 오후 2시야. 점심시간이 지났다고. 정신 차려! 점심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우리는 만난 것이다. 안쪽 테이블에서 한숨 돌리려다가 당황한 식당 직원이 보였다. 사장님!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다들 좋아해. 사장이면 사장이라서, 사장이 아니어도 언젠간 사장이 되고 싶을 거잖아. 덕담 같은 거지. 실은 내 꿈도 사장이야. 사장이 되려면 유명한 데를 많이 다녀야 해. 백주부터? 그럼, 낮에 맛있는 집이 밤에도 맛있으..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유희경 -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 어떤 인칭이 나타날 때 그 순간을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어둠을 모래에 비유할 수 있다면 어떤 인칭은 눈빛부터 얼굴 손 무릎의 순서로 작은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내며 드러나 내 앞에 서는 것인데 나는 순서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사실은 제멋대로 손 발 무릎과 같이 헐벗은 것들을 먼저 보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인칭이 성별과 이름을 갖게 될 때에 나는 또 어둠이 어떻게 얼마나 밀려났는지를 계산해보며 그들이 내는 소리를 그 인칭의 무게로 생각한다 당신이 드러나고 있다 나는 당신을 듣는다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 바닷물이 하늘에서 머무를 때 - 거친 바람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린다 창문을 열어두면 거센 해일이 나를 덮칠 듯해 가만히 닫고 기다렸다 오늘은 누가 그의 심..
빛의 이방인 김광섭 - 씨앗의 얼굴 - 네가 빛을 이루었다. 너는 상징이 될 거야. 가지 못한 나라에서 너는 추앙받는다. 슬픔은 너의 어여쁨 아래에서 고개 숙인다. 어린 마음이여, 좋은 거야. 선하지. 네가 알던 것과는 다른 맛이야. 씨앗을 봐 눈감아 줄게. 본래 기쁨대로 눈뜨게 될 거야. 순수와 지혜를 가꾸며 야심 차게 살 거야. 봐, 홍채를 찢고 나오는 씨앗의 얼굴. 너의 눈도 참된 아름다움을 갖게 될 거야. 싹이 트고 단 열매가 맺힐 거야. 선악과도 자기의 씨앗을 품게 될 거다. 좋은 거야. 선하지. 네가 알던 것과는 다른 맛이야. 너는 씨앗의 사람이다. 눈을 떠라. 씨앗이 열리고 있다. 진심이 털갈이하고 있다. 네 뜻대로. 네 뜻대로. 교만이 지옥 불 같구나 매서움과 두려움을 심어 주고 싶었는데 벌거벗음을 알았을 때..
호시절 김현 - 눈앞에서 시간은 사라지고 그때 우리의 얼굴은 얇고 투명해져서 - 두 사람이 걸어가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눈 쌓인 진부령을 넘어가며 멀리서 가만히 이쪽을 보는 것을 보았다 부모였다 민박이라는 글자가 붙은 창문 아래에서 반짝이는 것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느 땐가 눈이 많이 와 저 숙소에 짐을 풀고 아이를 갖게 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눈은 내리고 어둠 속에서 촛불 앞에 발가락을 모으고 두 사람은 두 사람밖에 보지 못하지만 끝없이 같은 곳을 바라본 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렇게 빤한 인생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민박에서 해야 할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고 눈은 참으로 근사하여 멀리서 가만히 아무것도 없는 쪽을 보아서 슬픔에 눈을 뜨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 때문에 탄생해 이쪽에 서 있게 ..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이윤학 -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 오른손 검지 손톱 밑 살점이 조금 뜯겼다. 손톱깎이가 살점을 물어뜯은 자리 분홍 피가 스며들었다. 처음엔 찔끔하고 조금 있으니 뜨끔거렸다. 한참 동안, 욱신거렸다 누군가 뒤늦게 떠난 모양이었다. 벌써 떠난 줄 알았던 누군가 뜯긴 살점을 통해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아주 작은 위성 안테나가 생긴 모양이었다.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었다. - 설핏 - 설핏 기운 모양에 안도를 해야 할지 생각을 가다듬고 말머리를 고친다 좋은 일은 좋게 생각하면 좋겠다 그게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