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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파로호 김영남 - 반딧불이에 시그마를 붙일 때 - 깜박깜박하는 자, 난해하구나 수학 공식처럼 낯선 곳에 와 풀고 있는 너의 수열 함수관계가 허공에 쓰인다 또박또박 징검다리 놓으며 극한에 닿으니 풀벌레 울음도 달빛으로 수렴한다 거기, 네 다스리는 국가가 있고 법과 변방도 평화롭구나 그래, 이런 평화의 무한대 발산이란 어디까지를 포함해야 하느냐 지금 저 별들에 시그마를 붙이고 있는 자는 생각 띄엄띄엄 낳아 진동하게 하니 허공이 난해하지 않게 깜박이는구나 사랑의 해(解)도 새롭게 구해지는구나 - 평화의 고원 - 아아 이곳은 평화의 고원 폭신한 들판에 몸을 뉘어 바람 두어 장 위에 덮고 크게 숨 들이켜면 이제야 살아있음을 느껴 파아란 하늘 뭉게구름 향해 내 마음 편안히 갈 수 있겠네 그리워는 말고 평화의 고원에서 너희를 지켜..
오늘 아침 단어 유희경 - 버린 말 - 버린 말 위에는 이파리 돋아나 흔들리고 꽃을 찾아내 피워 올리다가 지나가는 사람의 아래, 툭 던지기도 하다 바람이 불고 피가 놀고 거리에 찾아가 한없이 등지고 서 있다가 문득 돌아서는 버린 말 위에는 친구가 찾아오기도 하다 엿보는 사람들이 있고 애써 뒤적이는 사람들도 있고 좁은 길목으로 들어서고 그림자를 날름대기도 하는 그럴 땐 몰래 아프기도 하다 아니오와 예 사이를 끈기 있게 망설이는 사람이 있으면 어깨를 툭 치고 직장으로 돌아가는 사무원처럼 춥기만 하기도 하다 꿈이 너무 많은 아이처럼 복도를 지나가며 어떤 소리를, 추억을 불러일으킬 괴음을, 그렇지만 쓸모없지만은 않은, 그런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있고 애써 모른 척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지 않았는지 망설이는 버린 말은 인파를 향해 나..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임솔아 - 환승 - 무결한 중심각을 지닌 사람들이 자전거의 미끈한 바큇살처럼 유유히 굴러갈 때 이를 가는 마음으로 절름발이는 지면에 다리를 간다. 슬개골이 무릎보다 더 커진다. 절름발이 별이 우주에서 끝없이 고리의 반쪽을 절고 있다. 불완전한 궤도로서 다른 별의 완전한 궤도를 침입하고 있다. 수많은 별똥별들이 구골(枸骨) 열매인 양 떨어진다. 작은 짐승들은 신의 눈물을 보듯 경건해진다. 절름발이만이 우리들 중 유일하게 우주에 개입하고 있다. 절름발이가 걸어간다. 가장 가까운 자성부터 끌어당기는 만유인력을 몸소 실천하면서 가드레일을 자기 몸으로 환치하면서 뒤쪽에서 걷는 사람들과 더 가까워지면서 일호선에서 이호선으로 차가운 손잡이에서 더 차가운 승객에게로 자기 몸을 옮기면서. 삼박자로 걷는 개가 평행우주처럼 지상에..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병률 - 왜 그렇게 말할까요 - 우리는, 우리는 왜 그렇게 말할까요 그렇게 말한 후에 그렇게 끝이었다죠 그 말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니 절대 겹치거나 포개놓을 수 없는 해일이었다지요 우리는 왜 그렇게 들어놓고도 그 말이 어떤 말인지를 알지 못해 애태울까요 왜 말은 마음에 남지 않으면 신체 부위 어디를 떠돌다 두고두고 딱지가 되려는 걸까요 왜 스스로에게 이토록 말을 베껴놓고는 뒤척이다 밤을 뒤집다 못해 스스로의 냄새나 오래 맡고 있는가요 잘게 씹어 뼈에 도달하게 하느라 말들은 그리도 억센가요 돌아볼 일을 만드느라 불러들이는 말인가요 대체 그 말들은 어찌어찌하여 내 속살에다 바늘과 실로 꿰매 붙여 남겨놓는단 말인가요 - 알아 - 그 왜 십수 년도 전에 내가 했던 말 있잖아 그거 사실 후회해 그때는 몰..
우주적인 안녕 하재연 - 우주 바깥에서 - 추위가 없었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은 꼭 이런 방식이어야 할까. 외계인에게 손가락이 주어진다면 다른 생물에게 온도를 전달하며 생명을 유지하게 될까. 뜨거운 열역학적 죽음들 사이로 시간이 흐른다. 어둠이 완벽하게 얼어붙어 있다. 나의 호흡이 매 순간 사라질 것만 같다.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서의 나 손아귀 속의 따뜻함은 너와 나의 삶을 손상시키지 않고 이곳 건너편의 이곳으로 옮겨 갈 수 있을까. 상처 난 아이의 발가락이 조개껍데기 안에 담기듯이. - 엔트로피 - 우리는 서로 모른다 나는 너를 안다 추위를 타는 체질도 붕어빵을 좋아하는 입맛도 상실의 물결에 여과(濾過) 나는 엔트로피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김민정 -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 엉덩이가 시려 보니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반팔 티셔츠에 팬티 바람으로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정글짐도 있고 그네도 있고 철봉도 있고 미끄럼틀도 있는데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건너편에 누가 없으니 세월아 네월아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건너편에 누가 정말 없는 걸까 노려보다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누가 불러 나왔나 내가 홀려 나왔지 혼자니까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발에 묻은 모래 털기 귀찮으니까 모래 속에 발을 더 파묻어가며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어느 밤 그랬으니까 다신 그런 밤 없기를 하였는데 또 까먹고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시소 위에 비가 앉으면 치사해서 안 나가던 밤이야. 시소 위에 눈이 앉으면 더러워서 ..
지금 여기가 맨 앞 이문재 -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여럿이 있을 때 조금 고독하고 혼자 있을 때 정말 자유롭게 혼자 자유로워도 죄스럽지 않고 여럿 속에서 고독해도 조금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그리하여 자유에 지지 않게 고독하지만 조금 자유롭게 그리하여 고독에 지지 않게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 고독을 고독고독 - 고독을 씹어 먹자 고독고독 다 먹었다 자 이건 자유의 맛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안희연 - 야간 비행 - 나는 이 비행기의 유일한 승객이자 조종사, 잠과 잠을 끝없이 이어 붙인 밤의 상공을 날아갑니다 조종사의 첫번째 자질은 어둠의 리듬을 타는 일이라고 엄마는 말했지요 불쑥불쑥 솟은 꿈의 허들을 넘을 때마다 부드럽게 출렁이는 잠 나는 유리 조각을 쥐고 둥글게 몸을 웅크립니다 발가락이 생겼습니다 우주를 떠돌던 목동은 기르던 양을 잃고 탯줄로 목을 감았다지요 나는 눈을 감고 촛농이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어요 조종사의 두번째 자질은 아름다운 귀를 갖는 일 나는 귓속에 작은 귀를 감추어 들리지 않는 음악을 채집하죠 더 먼 캄캄함을 향해 방향을 틀어요 눈꺼풀 위로 칼날 같은 꽃잎이 쏟아지고 날마다 비행 일지를 써내려갑니다 계기판을 믿지 않은지는 오래되었어요 흔들리거나 뒤집히는 재미 도착하지 않는 동안에..
밤의 입국 심사 김경미 - 연애의 횟수 - 그 나라 입국할 때는 기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밤의 횟수를 가령 검은 눈물 자국 베개를 지나 침대 밑으로 죽은 팔처럼 길게 흘러내린 밤 그렇게 죽음의 태도를 지녔던 첫 결별의 밤 스물한 살의 봄이었는지 열일곱 살의 책가방 든 가을 고궁이었는지 서른다섯 살까지는 몇 번의 태도가 있었는지 가장 최근에는 누구였는지 온 생에 단 한 번의 태도도 없었던 불행한 자를 제외한 누구나 실연의 피격(被擊)과 가격(加擊)의 횟수를 실명과 주소까지 낱낱이 기입해야 골목의 모양과 부피가 다른 지도를 허락하는 밤의 입국심사서를 써야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 아무 사이 -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면 아무 사이가 되는 우리 사이 실연한 이들의 이름을 모조리 잊으면
울프 노트 정한아 - 꿀과 달 - 부풀어 오르는 반죽 라벤더 꿀통 속으로 간 꿀벌 느린 아침 햇볕 현관을 들어서는 손톱 밑이 까만 그의 목덜미에선 그을린 빵냄새가 난다 어디 갔다 왔어요? 간밤에 잠깐 지옥에요 일이 생겨서요 폐허에서 태어난 돌들은 부서진 살점들을 오래 모으고 어제부터 어제보다 조금 덜 존재하기 시작하고 있는 죽은 꿀벌 썩지 않는 삼켜버릴 수도 없는 - 날것 - 시에는 유독 성기와 음부와 고환과 그 모든 입에 올리기 껄끄러운 낱말들이 종이 위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있다 왜인지는 아직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