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73)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김박은경 - 어디는 있고 우리는 없고 - 골목은 있고 건물은 있고 간판은 있고 그늘은 있고 햇살은 있고 외면은 있고 예감은 있고 바깥은 초가을 청청한 숨이 도는데 바람은 없고 창은 없고 물기는 없고 계절은 없고 기척은 없고 축복은 없고 성급히 눈 감긴 영혼들을 가만히 흔들면 층층이 우르르 내가 깨어나는데 악몽은 있고 허기는 있고 통증은 있고 치욕은 있고 진창은 있고 끝장은 있고 옥상은 있고 아침은 없고 무사는 없고 비명은 없고 문은 없고 신발은 없고 이름은 없고 유언은 없고 정령은 없고 예외는 없고 무서워 너무 무거워 불가능한 울음을 삼키며 이제 우리 어디로 가나요, 물을 때 어디는 있고 우리는 없고 개미들은 아직 다리를 떠는 어린 여치 위로 부지런히 흙을 물어다 덮는데 - 가진 것 - 있음과 없음 사이 뚜렷한 ..
내가 나일 확률 박세미 - 반투명한 - 호수 위 얇은 얼음이 깨지고 있다 나의 어린 하마는 허우적대지 않는다 뿌연 얼음이 부서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어도 작은 두 귀만 수면 위에 띄워두고 사라진다 나의 어린 하마는 아마 물속에서 좋았을 것이다 유리를 사랑한 적 있다 더이상 투명해질 수 없을 만큼 투명해서 속았다 모두 다 보여주었지만 보이지는 않았다 먹구름을 사랑한 적 있다 피부를 긁어 상처나게 하는 태양을 모두 다 가려주었지만 두 발을 들고 서도 만질 수가 없었다 나의 어린 하마는 얼음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 무인도 - 언니 우리 무인도에 가자 아니 가지 말자 그만 흔들어 이제 그만 미련은 미련함의 약자일까 지우개로 지우고 남은 자국일까 충분해 고마워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허수경 - 내 손을 잡아줄래요? - 어느 날 보았습니다 먼 나라의 실험실에서 생의학자가 내가 가진 인간에 대한 기억을 쥐가 가진 쥐의 기억 안에 집어넣는 것을 나와 쥐는 이제 기억의 공동체입니다 하긴 쥐와 나는 같은 볕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사랑을 할 때 어떤 손금으로 상대방을 안는지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지요 쥐의 당신과 나의 당신은 어쩌면 같은 물음을 우리에게 던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그냥 아무 말 없이 잡아주시면 됩니다 쥐의 당신이 언젠가 떠났다가 불쑥 돌아와서는 먼대륙에서 거대한 목재처럼 번식하는 고사리에 대해서 말을 할 때 나의 당신은 시간이 사라져버린 그리고 재즈의 흐느낌만 남은 박물관에 대해서 말할지도 모릅니다 쥐의 당신이 이제 아무도 부르지 ..
빛의 사서함 박라연 - 아는 사이 - 내 자리는 아직 운전석 옆이다 아는 얼굴부터 면허증을 주는 저쪽을 무면허로 한번 쳐들어가봐? 말똥거리다가 좌판만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팔순 할머니와 마주쳤다 아픈 풍경들을 만날 때마다 외상 긋는 일 부끄러워 황급히 차에서 내렸지만 겨우 어린 배추 한 단과 무 세 개을 샀다 마수라며 고맙다며 환히 웃는 할머니와 이제 아는 사이다 안면을 더 사고 싶은 나는 장터를 떠도는 뜨거운 눈시울들을 긴 빨대를 꼽고 빨아 마셨다 떨이로 팔아넘길 뻔했던 허기들과 神의 주머니 사정도 오늘만은 나와 아는 사이다 - 별의 아이 - 휘영청 기운 달을 보며 달이 왜 별의 아이를 비추는지 생각했다 사실 낮에 마주쳤던 별의 아이를 지난밤에는 나를 보며 왜 웃지 않을까 걱정했다 오래된 기억이 아직도 너를 괴롭히는지 부끄..
손가락이 뜨겁다 채호기 - 당신에게로 흘러가는 것이 내게 있다면 - 내게서 당신에게로 흘러가는 무엇이 있다면, 수화기 속을 흐르는 강물처럼, 발목을 축이는 저 목소리처럼, 모른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노을이 흔드는 저녁을 달리는 차 안에 앉아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모른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당신에게서 내게로 흐른다고 해도 좋겠지요. 그러면 질투는 어디로 흐를까요? 어느 날 내 눈에서 샘솟는 것이 당신을 적시지 않고, 내 가슴에서 샘솟는 것이 비가 되어 당신 창문을 두드린다면, 번뜩 번개가 눈을 뜨고 캄캄한 밤을 깨우듯 천둥이 울부짖을 때 당신은 그의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오겠지요. 그러곤 빗방울처럼 흩뿌려놓은 낯선 글씨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더듬어 열겠지요. 차마 모른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샘솟는 질투는 흐를 곳이 없답..
생물성 신해욱 - 과거의 느낌 - 등을 맞고 고개를 돌렸다. 그게 아니라 다른 일이 일어날 거야. 틀림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는 인간과 같은 감정을 몇 개씩 달그락거려본다. 이럴 때 인간이라면 보통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이상하다. 이렇게 시간이 많은데. 죽지 않은 지 참 오래된 것 같은데. 나는 더 이상 키가 크지 않는데. - 키 - 마음의 키가 사람의 키라면 누군가는 기린보다 길쭉한 기럭지를 누군가는 달팽이와 도토리 키재기를 아이들의 키를 키우는 법 마음이 자라면 늙어서도 키가 클 텐데 줄어드는 이도 수두룩
찬란 이병률 - 찬란 -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
생의 빛살 조은 - 꽃과 꽃 사이 -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과 꽃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도드라지게 아름다운 꽃들은 그 거리가 한결 절묘하다 꽃과 꽃 사이 꿀벌이 난다 안개가 피어오른다 해와 달의 손길이 지나간다 바람이 살얼음을 걷으며 분다 향기가 어둠의 계단을 반짝이며 뛰어 오르내린다 봉긋해지는 열매들은 서로의 거리를 앙큼하게 좁힌다 - 그렇게 - 대부분의 시는 그땐 그랬지 그날은 이랬지 언제부턴가 그러지 않았지 그렇지 않았지 나는 아직도 그러고 싶은데 앞으로도 그렇고 그렇게
메롱메롱 은주 김점용 - 감자꽃 피는 길 - 내가 아직 너의 문간에 이르지 못했으니 이곳에서 그냥 밤을 새우고 말리라 오늘 하루 얼마나 걸었을까 지는 해의 부르튼 발바닥이 보여 문을 잠근 그대여 너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을 테지 이 길의 두근거림 가도 가도 계속되는 흰 꽃들의 속삭임 가만히 주저앉아 쓰다듬어보면 종일 햇볕이 데우지 않았어도 수많은 발길로 뜨거워진 길 긴 가뭄에도 땅속으로 뻗는 저 알알의 힘 너는 아직 모르고 있을 테지 간간이 한 줌의 굴욕 한 줌의 신산한 기억들도 흰 감자꽃 속에 널브러져 있지만 길을 따라 아름답게 늙어가는 사람들 너는 아직 손잡아보지 못했을 테지 문을 잠근 그대여 나는 아네 언젠가 내가 너의 문간에 이르렀을 때 너무 단단히는 잠그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삐걱거려주리라는 것을 끝끝내 열리지 않아 ..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최치언 -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 우리는 모두 우측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듣지 마라 소리는 계속해서 우리들의 귓전을 때렸다 귓속에서 시뻘건 태양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좌측은 연필의 힘을 믿는다 나무의 치졸함을 믿고 의사당의 순결을 믿는다 좌측은 형제들의 오만을 믿는다 그러므로 좌측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너희들이 여자이었다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여자로 사랑하는 나약한 방식을 믿는다 귀를 도려내라 그리고 우리는 귀 없이 계속 걸었다. 그때 좌측에서 움직였다 보지 마라 움직임은 계속해서 우리들의 눈꼬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담장의 덩굴이 눈알을 휘감아 낚아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좌측은 우리들 반대쪽으로 기울어 있다 높은 담장을 드리우고 좌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