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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 난 존재를 안고 있는 허당이었어요 - 너는 중얼거렸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차 소리가 났다 잎새들이 바깥에서 지고 있었다 너는 중얼거렸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난 존재를 안고 있는 허당이었어요 단 한 번도 뿌리와 소통을 해보지 않은 나뭇잎 울 수도 없었다 울기에는 너무 낡은 정열이었다 뿌리에서 떠나 다시 뿌리를 덮어주는 나뭇잎 웃을 수도 없었다 웃기에는 너무 오랜 정열이었다 - 비슷한 울먹임을 껴안고 - 난 사랑을 했는데 우린 단 한 번도 이야길 나눈 적이 없었다 내가 웃으면 너도 웃었고 내가 울면 너도 울었고 한 사람의 사랑이 두 사람의 사랑보다 작은 건 아니잖아요 안아보고 싶었는데 우린 단 한 번도 이야길 나눈 적이 없었다
Lo-fi 강성은 - 공원 -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산책하는 개들이 많았다 산책하는 벤치들이 많았다 산책하는 유령들이 많았다 산책하는 나무들이 많았다 산책하는 새들이 많았다 산책하는 별들이 많았다 산책하는 주파수들이 많았다 산책하는 발자국들이 많았다 모두 작은 모형들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 채 걷고 있었다 산책하는 지구도 알지 못하는 산책하는 가을도 알지 못하는 공원의 밤 - 어린이의 그림 - 날아가는 새들이 많았다 날아가는 나무들이 많았다 날아가는 구름들이 많았다 날아가는 바람들이 많았다 날아가는 꽃잎들이 많았다 날아가는 잎사귀들이 많았다 날아가는 웃음들이 많았다 날아가는 동물들이 많았다 날아가는 지붕들이 많았다 날아가는 어린이들이 많았다 날아가는 가족들이 많았다 어린이의 그림 속에는 발을 디딜 땅도 필요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 믿을 수 있는 나무는 마루가 될 수 있다고 간호조무사 총정리 문제집을 베고 누운 미인이 말했다 마루는 걷고 싶은 결을 가졌고 나는 두세 시간 푹 끓은 백숙 자세로 엎드려 미인을 생각하느라 무릎이 아팠다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대화의 수준을 떨어뜨렸던 어느 오전 같은 사랑이 마룻바닥에 누워 있다 미인은 식당에서 다른 손님을 주인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의 솜털은 어린 별 모양을 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은 밥을 먹다가도 꿈결인 양 씻은 봄날의 하늘로 번지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을 생각하다 잠드는 봄날, 설핏 잠이 깰 때마다 나는 몸을 굴려 모아둔 열(熱)들을 피하다가 언제 받은 적 있는 편지 같은 한기를 느끼..
우울은 허밍 천수호 - 잎과 잎 사잇길 -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것이 나무의 뜻이 아니어서 거리는 추상이다 잎과 잎 사이는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므로 추상은 고유하다 잎과 잎 사이는 울돌목의 파도가 지나가는 해협, 새 울음이 추상을 토악질한다 아무리 게워도 죽음은 추상이다 한 사람이 떠난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가 잎과 잎 사이처럼 갈 수 없는 거리여서 거리는 죽음에 고유하다 잎과 잎 사이 조류가 거세어서 우는 소리로 들린다는 울돌목 그 해협을 가르며 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잎과 잎이 공허한 추상으로 떨어진다 - 왜가리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삶과 삶 사이 죽음과 죽음 사이 떠난 이의 발걸음 사이 날아오르는 왜가리 추상은 고유하다네 왜가리는 추상이라네 고맙긴 한데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고 있다네 창조는 천지가 아니라..
여름 외투 김은지 - 밥을 먹는다 - 할 얘기가 있어 만난 저녁 잘 닫혀 있는 수저통의 뚜껑을 다시 닫고 엠보싱 티슈가 들어 있는 휴지 갑을 아까 자리로 밀어놓는다 귀퉁이가 녹은 플라스틱 컵의 갈색 물수건으로 손을 또 닦은 후 숟가락을 든다 한 번도 눈은 마주치지 않으며 밥을 다 먹고 지하철 반대 방향 각자의 길을 갈 때 기둥 너머 플랫폼 창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 어느 것도 바라보지 않는 시선 이런 시를 써왔을 때 누가 말했다 나에게도 똑같은 일이 있었어요 - 일상을 말하는 시 - 해질녘의 노을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바라본 저쪽 너머 하늘은 왠지 모를 애틋함 모든 사람이 같은 곳을 향해 가진 않는다 뚜껑 색은 똑같은데 찰랑찰랑 흐르는 오색 찬란 걸음들 내 눈에 담긴 그림을 다들 봐주면 좋겠다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황인찬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 용수는 내 친구, 어릴 적에 자주 놀았다 골목에 온종일 나와 있었다 주말 아침에도 용수가 있었고 저녁의 귀갓길에도 용수가 있었다 용수를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잠자리도 잡고 돌도 던졌다 여우비 맞으며 술래잡기하던 날, 나는 용수가 나를 찾지 못했으면 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후로 용수를 다시 볼 수 없었고 지금도 맑은 날에 비가 내리면 그때가 떠오른다 누가 내게 첫사랑에 대해 물으면 나는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 희망상상 - 내 희망 사항은 너의 기억 속에 남는 건데 결국 남은 건 너였다
후르츠 캔디 버스 박상수 - 후르츠 캔디 버스 - 당신과 버스에 오른다 텅 빈 버스의 출렁임을 따라 창은 열리고 3월의 벌써 익은 햇빛이 전해오던 구름의 모양, 바람의 온도 당신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던 타인이어서 낯선 정류장의 문이 열릴 때마다 눈빛을 건네보지만 가로수와 가로수의 배웅 사이 내가 남기고 가는 건 닿지 않는 속삭임들뿐 하여 보았을까 한참 버스를 쫓아오다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하얀 꽃가루, 다음엔 오후 두시의 햇빛, 그사이에 잠깐 당신 한 번도 그리워해본 적 없는 당신 내 입술 밖으로 잠시 불러보는데 그때마다 버스는 자꾸만 흔들려 들썩이고 투둑투둑 아직 얼어 있던 땅속이 바퀴에 눌리고 이리저리 터져 물러지는 소리 무슨 힘일까 당신은 홀린 듯 닫힌 가방을 열고 오래 감추어둔 둥글고 단단한 캔디 상자를 꺼내네 내 손바..
단 한 번의 사랑 최갑수 - 정기 구독 목록 - 나의 정기 구독 목록에는 늦은 밤 창가를 스치는 빗소리와 그 빗소리를 들으며 슬쩍슬쩍 읽어보는 윤동주 백석 박용래 같은 눈물을 닮은 이름 몇 자들 새벽녘 앞마당에 고여 있는 막 떠다놓은 찻물처럼 말갛기만 한 하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바람난 애인이 또박또박 적어준 빛이 바랜 하늘색 편지 읍내에서 단 하나뿐인 중앙극장의 야릇하게 생긴 배우들 그 배우들이 슬픈 얼굴로 보여주는 화끈한 '오늘 푸로' 환절기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나흘간의 감기 그때마다 먹는 빨갛고 노란 알약들, 일요일 담에 널어 말리는 초록색 담요와 그 담요를 말고 자는 둥그스름한 낮잠 그 낮잠 위로 헬리콥터가 한 대 가끔 부르르르 저공비행을 하다가 돌아가기도 하고 내 낮잠도 부르르르 따라 흔들리기도 하고 낮잠에서 깨..
한 문장 김언 - 나와 저것 - 나는 저것과 싸워야 한다. 문밖에 있는 저것과 싸워야 한다. 보이지 않는 저것과도 싸워야 한다. 내 발밑에 있는 이것과도 싸워야 하듯이 저것이 있다. 저것은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저것과 싸워야 한다. 저것은 문밖에 있다. 문밖에서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저것의 형상과 싸워야 한다. 저것의 자세와 기질과 알 수 없는 예정과 싸워야 한다. 저것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다. 저것은 문을 열어젖히면서 들어온다. 저것은 들어오지 않고서도 들어와서 있는 것처럼 있다. 저것은 저것대로 괴롭다. 저것은 저것대로 외롭다고 있다. 저것은 저것대로 사람이 아니다. 저것은 저것대로 할 말이 있다. 저것은 저것대로 답답한 저것을 견디고 있다. 저것은 저것대로 견디고 있는 저것을 나한테만 전가하지 ..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 서시 -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