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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책 남진우 - 타오르는 책 -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김점용 - 허공 길 -꿈64 - 커다란 벽화를 그린다 다른 누군가는 반대쪽에서 그린다 그는 어린시절의 나다 구름이 지나가면서 내 그림을 지운다 내 짚신이 반대쪽의 그림을 지운다 내가 다른 귀퉁이에서 그리기 시작하자 아이도 반대편에서 붓을 놀린다 거대한 바퀴, 윤회를 그리고 있단다 그제야 걸개그림은 원래 완성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벽이 허공에 붕 떠 있고 아래쪽을 보니 줄사다리가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다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끌어왔는가 눈뜰 수 없는 유년의 눈부신 물결인가 몇 줄 경전의 달콤함인가 야곱의 사다리는 말씀에 닿았는데 나는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올랐는가 세상은 모두 저 아래 호수에 잠들었는데 때론 수정처럼 맑은 얼음 기둥을 타고 아득한 공중에 발 딛고 서서 낚시를 하다가 그대로 얼어붙는 꿈 그때 누군..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이원 - 아이는 공을 두고 갔다 - 한 아이가 두 발로 축구공을 차며 한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빨며 간다 나는 비어 있는 두 발로 빠르게 걸으며 아이의 공기를 빼앗아 먹는다 아이는 발에서 머리로 공을 가볍게 차올린다 헤딩을 하며 구름을 뜯어와서 먹는다 아이가 제 두 손으로 목을 비틀어 머리를 떼어낸다 머리를 툭툭 차며 간다 아이는 원색이다 몸을 동쪽으로 잔뜩 웅크린다 어느 곳으로나 접속하고 싶은 나도 아이가 두고 간 길과 공을 대신 차며 간다 아직도 권력과 지구는 공처럼 둥글고 골목에 담기는 모든 것들의 콘센트가 집이다 아이는 어느 집 앞에 멈추어 서더니 머리를 툭툭 털어 목에 다시 갖다 끼운다 돌아보는 아이의 얼굴에 구름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하늘은 가로등을 핥고 있다 - 우울 - 열세 번씩 들락날락 나도 ..
아껴 먹는 슬픔 유종인 - 가을 하늘 - 하늘이 더 깊어진 것이 아니다 눈앞을 많이 치운 탓이다 밥그릇처럼 뒤집어도 다 쏟아지지 않는 저 짙푸른 늪같이 떨어지는 곳이 모두 바닥은 아니다 열린 바닥이 끝없이 새떼들을 솟아오르게 한다 티 없다는 말, 해맑다는 말! 가을엔 어쩔 수 없다는 말, 끝 모를 바닥이라는 말! 바닥을 친다는 것, 고통을 저렇게 높이 올려놓고 바닥을 친다는 것 그래서, 살찌고 자란다는 것! 당신이 내게 올 수도 있다는 것 변명은 더 이상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 - 왜 - 내가 왜 좋아? 발가락이 귀여워서 내가 왜 좋아? 대화가 잘 통해서 내가 왜 좋아? 예술을 사랑해서 내가 왜 좋아? 아는 게 많아서 내가 왜 좋아? 향기로워서 내가 왜 좋아? 찌질해서
거미는 이제 영영 돼지를 만나지 못한다 김중 - 세바스토폴 거리의 추억 - 태엽이 돌아가면서 인형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은밀한 회상 속으로 나는 끌려 들어갔다 바이올린은 높은 도에서 온종일 떨었고 흰 머리칼 휘날리며 빨간 눈을 치켜뜨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두근두근 저주해, 사랑해, 저주해…… 끝없음과 끝없음이 지상을 스쳐 잠시 만날 때 빛이 끌어내는 색깔의 형식으로 신음하는 사물들 어둠 속에 뿌리내린 식물들의 신성한 마비와 심연 위에 펼쳐지는 미로의 얼굴, 얼굴들 우리는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법은 알지만 그 끝이 무언지 결코 모르지 않던가? 시를 읽으면, 앉은뱅이 벌떡 일어나고 시를 읽으면, 광인이 맑은 눈빛으로 엉엉 울고 시를 읽으면, 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나, 일곱 원소로 분해되어 이렇게 당신 눈꺼풀에 매달려 있는데…… ..
이 달콤한 감각 배용제 - 노을 - 사라진 것이 아니다 해가 질 때 지상의 먼지들이 붉게 타오르는 건 아직 뜨거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먼지들의 혈맥 속에 진한 피가 돌고 있기 때문이다 소멸을 위한 춤이 아니다 무거운 형체를 꺼내놓고 잠시 한때의 가벼움을 향하여 제사를 올리는 것, 환생의 사원에 들러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다, 고 믿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종교를 나는 믿는다 - 길 - 언어적 표현의 한계를 느꼈을 때 나는 이 길을 걸어도 될까 고민했다 그런데 지금은 오직 길이 이것뿐이란 생각이다 사람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져 특별하기 보다 소소한 일상에 가깝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또 있는지 궁금해 여러 낱장을 뒤적이고 들춰보지만 대개 비슷한 소리뿐이다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신용목 - 소사 가는 길, 감시 -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건너 다방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한 줄 비행기 지나간 흔적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 차창에도 다방 풍경이 비쳤을 터이니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져 있었다 머리 위로 바둑돌이 놓여지고 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 시인분류 - 시 쓰는 사람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제목을 정하고 쓰는 사람 쓰고 나서 제목을 정하는 사람 쓰던 도중 제목을 정하는 사람 제목을 정하지 않는 사람 이름을 붙이는 일이 쓰는 일보다 어려울 때가 있다
낮은 수평선 김형영 - 나의 시 정신 - 내가 살아서 가장 잘하는 것은 멍청히 바라보는 일이다. 산이든 강이든 하늘이든, 하늘에 머물다 사라지는 먹장구름이든, 그저 보이는 대로 바라보는 일이다. 한밤중 홀로 (깨어) 수곡지에 낚시를 드리우고 찌를 바라다보듯 그렇게 바라보는 일이다. 무슨 새가 울고 무슨 꽃이 피고 질 때도 그 이름 같은 건 기억하지도 않고 그냥 무심히 바라보는 일이다. 겨우내 땅속에 숨었던 생명들이 궁금해지면 봄비를 시켜 그 땅속 생명들을 불러내시는 하느님처럼 지난 기억들을 불러내어서는 마음벽에 걸어 놓고 또 그걸 한없이 바라보는 일이다. 아예 눈감고 누워 꾸벅꾸벅 졸듯이 바라보는 일이다. 그러다 어느 날 어딘지 거기 눈앞을 가리는 것들 사이사이로 나를 바라보는 내가 보이기라도 하면, 두렵고 부끄러워 그만 ..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이성미 - 휙휙 - 건널목 앞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입 안 가득 꽃잎을 물고 달리는 차를 보고만 있었는데 밟히는 아스팔트를 동정하고 있었는데 혁명이 내 정수리에 깃발을 꽂더니 빨간 불 인데도 길을 건너가버렸습니다 나는 따라 건너다가 신호등이 고장나 길 한가운데 노란 선을 밟고 섰는데 꽃잎을 웩웩 토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트럭 위입니다 트럭은 가만 있는데 세상이 휙휙 지나가면서 클랙슨을 울리고 욕을 해댔습니다 남자가 올라타 트럭을 몰고 그곳을 빠져나왔는데 그러고 보니 없습니다 뛰어내렸는지 내가 밀어냈는지 아니 내가 트럭을 버렸는지 나는 그냥 개흙탕물 옆에 섰습니다 아이가 하나 둘 셋 떠내려갑니다 할머니가 건져 올려 키웠습니다 나를 찾아와 니가 엄마냐 너도 엄마냐 할 것입니다 그때 할머니가 나타나 얘야, 가자 내가 에..
쨍한 사랑 노래 박혜경 이광호 엮음 - 너와 나 - 여기 이 벤치에 앉아 겨울 냄새를 맡고 있는 너와 나는 순간 스친 이 냄새에 말을 잃고 깊이 넓어져만 가는 너와 나는 너의 손을 잡지 못하는 나와 내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오는 너는 바람처럼 스산하고 공기처럼 맑아 떨어지며 정지하여 영원히 정지해버린 너는 그림처럼 아름답고 기억처럼 참담하여 내가 너의 아버지이기를 바라고 네가 나의 어머니이기를 바라는 너는 여기 추운 나무들이 서 있는 벤치에 앉아 희망한다. 한 아이가 다른 한 아이의 친구가 되지 말기를 한 여자가 한 남자의 애인이 되지 말기를 그래서 맑은 하늘과 비어 있는 거리 멈춰 선 버스와 흘러가는 시간 사이로 너의 두 눈은 그림처럼 아름다워 겨울 냄새를 풍기고 겨울의 하늘 속으로 멀어져 내가 빠져든 우물, 거울이 된다. _이철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