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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쓰기, 시싸우기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유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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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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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인칭이 나타날 때 그 순간을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어둠을 모래에 비유할 수 있다면 어떤 인칭은 눈빛부터 얼굴 손 무릎의 순서로 작은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내며 드러나 내 앞에 서는 것인데 나는 순서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사실은 제멋대로 손 발 무릎과 같이 헐벗은 것들을 먼저 보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인칭이 성별과 이름을 갖게 될 때에 나는 또 어둠이 어떻게 얼마나 밀려났는지를 계산해보며 그들이 내는 소리를 그 인칭의 무게로 생각한다 당신이 드러나고 있다 나는 당신을 듣는다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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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이 하늘에서 머무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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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친 바람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린다 창문을 열어두면 거센 해일이 나를 덮칠 듯해 가만히 닫고 기다렸다 오늘은 누가 그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물길이 끝도 없다 나는 지나간 미래를 상상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내가 있는 곳은 여기 원한을 산 누군가가 자신의 죗값을 치르고 나서야 바닷물은 비로소 제 자리로 돌아간다 방금 전 코앞까지 다가온 파도를 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