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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터 좀 빌립시다 이현호 - 아름다운 복수들 - 복수를 사랑한다. 그건 복수보다 아름다운 일. 그림자는 하나의 전구 빛을 나누기 위해 스스로 흐려지면서, 하나의 꽃술에 매달린 꽃잎들처럼 분신한다. 빵조각을 나눌수록 배고픔은 깊어가지만, 굶주림에 대해 이야기 나눌 사람도 늘어난다. 퍼즐 같은 삶의 문법 안에 복수를 흩어뿌리기 할 때, 무의미가 의미를 가지치기할 때, 투명해지는 어깨들. 멜빵처럼 그 어깨에 두 팔 걸치고, 흘러내리지 않는 그림자가 될 때, 가지와 가지가 어긋매껴 만드는 그늘 아래 걸을 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둘 떨어져나간 꽃잎들이 퍼즐 조각으로 완성할 아름다운 복수들. 복수가 복수를 사랑해서 복수가 복수를 낳는, 그건 나무 더하기 나무는 숲보다 아름다운 일. - 미화 - 나약한 숲보다 더 견디기 힘든..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이규리 - 껍질째 먹는 사과 - 껍질째 먹을 수 있다는데도 사과 한입 깨물 때 의심과 불안이 먼저 씹힌다 주로 가까이서 그랬다 보이지도 않는 무엇이 묻었다는 건지 명랑한 말에도 자꾸 껍질이 생기고 솔직한 표정에도 독을 발라 읽곤 했다 그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전례가 그렇다는 거 사과가 생길 때부터 독이 함께 있었다는 얘기 이거 비밀인데,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목에 탁 걸리는 이런 말의 껍질도 있지만 중심이 밀고 나와 껍질이 되었다면 껍질이 사과를 완성한 셈인데 껍질에 묻어 있는 의심 이미 우리가 먹어온 달콤한 불안 알고 보면 의심도 안심의 한 방편이었을까 - 발견 - 지나침의 맛을 알아낸 양반 치우침 없는 난을 치다가 선의 끝에 묵직한 먹을 새기고 돌이킬 수 없어졌네 죄 돌이킬 수 없어
희다 이향 - 한순간 - 잠시 눈감았다 뜨면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어제저녁 붉게 노을 졌던 태양의 한때처럼 오늘아침 초록으로 흔들리는 잎의 한때처럼 한순간이란 붙잡아두고 싶은 것이어서 새벽마다 물방울이 맺히는 것일까 물방울 같은 한순간 그 물방울만한 힘이 나뭇가지를 휘게 하는지 그때 붙잡고 싶었던 것은 네가 아닌 그 순간이었다 당신도 그렇게 왔다 가는 걸까 어느 순간 기척 없이 빠져나간 손바닥의 온기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의 그늘처럼, 이미 예정된 한순간 속의 우리들 - 전부 - 이게 참 슬프다 누구에겐 일순간이 상대적으로 나에게만 영원처럼 느껴지는 모든 것들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김이강 - 12월주의자들 - 사실 나는 좀더 버릇없이 살고 싶어요 지금보다도 더 예의 없이 살고 싶어요 포도를 씻으면서 계속 생각한 거예요 그런 게 멋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하죠 지금보다 훨씬 더 예의를 차리곤 하죠 그건 내 콤플렉스예요 컴플렉스라고 분명히 썼는데 콤플렉스로 바뀌는 한글 파일의 콤플렉스처럼 말이에요 오늘 이 글은 손으로 썼지만 옮기면서는 다른 글이 되어버리고 마는 콤플렉스예요 음악가가 되려고 했어요 한번쯤 그럴 수도 있잖아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들처럼 내가 아무것도 아닌 적이 있을까요 당신의 음악을 사랑해요 아무것도 아닌 때에도 음악은 음악이고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후에도 아무런 연관성 없이 콤플렉스처럼 일어났어요 이런 건 다 콤플렉스예요 노트에는 컴플렉스라고 썼는데 여..
귀한 매혹 양진건 - 이름 - 미성이라는 애의 이름을 자꾸 미송이라고 헛갈리는 이유는 송, 송, 송할 때의 진동이 투명해서 그런 건지, 그 애 살 속에나 박혔음 직한 솔 나무 냄새 때문인 건지. 어떻든, 어떻게라도 부르면 샛길로 해서 내 귓전을 따스하게 하는 잰걸음으로 그 애는 내게 온다 - 의도 - 이유 없이 잘해주는 이를 조심하고 경계하라 일렀는데 이유 없이 잘해주고 싶은 이가 생겨서 내가 한 말을 주워 먹고 싶었다 그런 이들이 많아져서 약간은 친절하고 조금은 따뜻한 의도가 없는 것이 의도인
그늘의 발달 문태준 - 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 - 들키지 않아도 살금살금 아무도 없는 부뚜막에서 장독대 낮은 항아리 곁에서 쪼그리고 앉아 토란잎에 춤추는 이슬처럼 생글생글 웃는 아이 비밀을 갖고 가 저곳서 혼자 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 언제였던가, 간질간질하던 때가 고백을 하고 막 돌아서던 때가 소녀처럼, 샛말간 얼굴로 저곳서 나를 바라보던 생의 순간은 - 아이 - 지나간 시절에 영원히 물음표를 껴안고 언제였던가 순한 얼굴이 새파란 억울을 띄운 채 새빨개지도록 세상 떠나가라 눈물방울을 주렁주렁 마냥 좋았었다 그땐 그랬지 움켜쥐기엔 가시가 많아서 군데군데 상처를 입는 그래 그런 날도 있었지 하지만 시간이 좋은 게 무언 줄 아나 해상도가 떨어져 구석구석 낡아 헤지면 한낱 잿가루로 쉬이 보내줄 수 있다는 점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 희음 - 어루만지는 높이 - 계단을 오른다 멀어지는 머리를 세고 차가운 난간을 쓰다듬고 심장처럼 자신의 무게를 가늠하는 너무 익은 감처럼 계단을 오르며 내려다보면 내일이 오늘을 밀어내는 것이 하나가 하나를 어루만지는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어루만지는 시간은 맥박과 맥박 사이에도 있어 숨죽이지 않고도 나는 이토록 고요해져서 바람이 내는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조금씩만 밀어내기로 한다 무른 과일을 씻으며 발끝에 힘을 준다 소리를 불러낸다는 건 바람이 지은 계단을 당겨 오는 것 그것은 한없이 말랑하고 깊어 계단에 맞춰 흥얼거리며 나는 없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고 - 소우주 - 가장 먼저 눈에 띈 책과 만년필 노트북과 물티슈 손목 보호대와 면봉 코스모스의 안에서 티끌에 불과할 책 거치대 인덱스 인공눈물 나는 ..
히스테리아 김이듬 - 독수리 시간 - 독수리는 일평생의 중반쯤 도달하면 최고의 맹수가 된다 눈 감고도 쏜살같이 먹이를 낚아챈다 그런 때가 오면 독수리는 반평생 종횡무진 누비던 하늘에서 스스로 떨어져 외진 벼랑이나 깊은 동굴로 사라진다 거기서 제 부리로 자신을 쪼아댄다 무시무시하게 자라버린 암갈색 날개 깃털을 뽑고 뭉툭하게 두꺼워진 발톱을 하나씩 하나씩 모조리 뽑아낸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며칠 동안 피를 흘린다 숙달된 비행을 포기한 채 피투성이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이제는 무대에 오르지 않는 아니 캐스팅도 안 되고 오디션을 보기도 어중간한 중년 여자 연극배우가 술자리에서 내게 들려준 얘기다 너무 취해서 헛소리를 했거나 내가 잘못 옮겼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냥 믿고 싶어서 경사가 급한 어두..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 - 청혼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사랑의 모양 -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집중하면 많은 것이 보인다 보이지 않음에서 보이는 것을 찾는다 대놓고 사랑한다 말하는 덤덤함과 담백함 사이의 어떤 음성보다 그 마음이 너무나도 가엾고 소중해 감히 꺼..
친애하는 사물들 이현승 - 누아르 - 끈끈함이란 파리들의 우정이네 같이 밑바닥을 기어본 자들의 것이지 날개가 피부든 손톱이든 간에 그 날갯짓이 경박하든 말든 그것은 떠오르는 데 도움이 되네 밑바닥 생활을 벗어나면 곧장 천상인 듯 날갯소리 힘차지만 한낱 파리 날개일지라도 누가 먼저 비상할 때 위험해지는 것이 바닥의 생리라네 바닥을 벗어나면 다른 바닥이 기다릴 뿐 껌딱지처럼 질기게 들러붙은 것이 밑바닥이지 호구에는 천상 고단함이 따르고 피곤은 업종을 가리지 않네 떼인 돈을 받으러 다니거나 밤길 조심해라 딸 예쁘더라 언뜻 들으면 어머니 말씀 같지만 한번 들으면 문신처럼 새겨지는 말들도 곧잘 한다네 상스러움과 불량기가 필수인 이 장르에서 중요한 것은 리듬인데 어딘지 뽕짝스러운 리듬은 건달들의 걸음걸이에 녹아 있고 흉터투성이의 순정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