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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쓰기, 시싸우기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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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잡아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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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보았습니다

먼 나라의 실험실에서 생의학자가 내가 가진 인간에 대한 기억을 쥐가 가진 쥐의 기억 안에 집어넣는 것을

 

나와 쥐는 이제 기억의 공동체입니다 하긴 쥐와 나는 같은 볕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사랑을 할 때 어떤 손금으로 상대방을 안는지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지요 쥐의 당신과 나의 당신은 어쩌면 같은 물음을 우리에게 던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그냥 아무 말 없이 잡아주시면 됩니다

 

쥐의 당신이 언젠가 떠났다가 불쑥 돌아와서는 먼대륙에서 거대한 목재처럼 번식하는 고사리에 대해서 말을 할 때

나의 당신은 시간이 사라져버린 그리고 재즈의 흐느낌만 남은 박물관에 대해서 말할지도 모릅니다

 

쥐의 당신이 이제 아무도 부르지 않는 유행가를 부르며 가을 강가를 서성일 때

나의 당신은 이 계절, 어떤 독약을 먹으며 시간을 완성할지 곰곰히 생각합니다

 

푸른 별에는 당신의 눈동자를 가진 쥐가 산다고 나는 말했지요, 당신, 나와 쥐의 공동체를, 신화는 실험실에서 완성되는 이 불우한 사정을 말할 때

 

내 손을 잡아줄래요?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그 막연함도 들어볼래요?

 

이건 불행이라고, 중얼거리면

모든 음악이 전쟁의 손으로 우리를 안아주는 그런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사랑이라고, 중얼거리면

모든 음악이 검은빛으로 변하는 그런 처참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다만 손을 잡아달라는 간절한 몸의 부탁일 뿐입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내 기억을 가진 쥐가 당신에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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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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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라디오에선

누군가 이별의 슬픔을 꺼내고

섣불리 짐작할 수 없는 축축한 마음을 적시며

 

점심엔

간밤에 꾸었던 꿈이 예지몽인지 자각몽인지

상몽인지 악몽인지 해몽을 부탁하며

 

저녁

지나간 하루의 끝자락을 붙들어

무탈하고 깨끗하게 달래며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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