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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마신다 이윤학 - 갈대 - 이제 제발 아픈 척하지 말자. 이제 제발 죄진 척하지 말자. 이제 제발 늙은 척하지 말자. - 유한(有限) - 컨디션 관리도 실력이라는 말 몸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 비로소 어려움을 실감한다 난이도는 해가 갈수록 상승하고 숙제처럼 해야 할 일이 쌓인다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한낱 인간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일 유한함을 흐르는 시간과 함께 체감하는 일 생과 사의 갈림길에선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 이 순간에도
꽃의 고요 황동규 - 슈베르트를 깨뜨리다 - 책꽂이 옥탑에서 책들 앞에 촘촘히 서서 살다가 책 뒤질 때 와르르 방바닥에 내리꽂힌 CD들 아 슈베르트 얼굴이나 이름이 적힌 판들. 이 한세상 살며 그래도 마음에 새길 것은 슈베르트, 고흐와 함께 보낸 시간에 새겨진 무늬들이라 생각하며 여태 견뎌왔는데. 껍질만 깨지지 않고 혹 속까지 상한 놈은 없는가 며칠 동안 깨진 사연을 하나씩 들어본다. 아니, 사연마저 깨진 맑음이다. 이틀 만에 듣는 폴리니가 두드리는 마지막 소나타는 맑음이 소리의 물결을 군데군데 지워 몇 번이나 건너뛰며 간신히 흘러간다. 뛸 때마다 마음도 건너뛰려다 간신히 멈춘다. 슈베르트여, 몸 뒤척이지 말라. 가만히 둘러보면 인간은 기실 간신히 깨지지 않고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시방 같은 봄 저녁 황혼이 어둠에 막 ..
레바논 감정 최정례 - 겨울 유리창 - 그렇게도 부드럽게 목덜미에 그렇게도 다정하게 귓불에 그러다가 갑자기 낚아채듯 날렵하게 햇빛이 발꿈치를 햇빛이 발꿈치를 쫓아와 물어뜯어 몸을 피해도 쫓아오고 캄캄한 방에 갇혔는데도 햇빛이 하백의 딸 유화의 허벅지로 어찔어찔하게 햇빛과 자고 하백의 딸 닷 되들이만 한 알을 낳아 그 알을 내다 버려도 뭇짐승이 핥고 아지랑이의 깃털이 덮어주어 으앙하고 한 아이가 알에서 걸어 나왔듯 너 깜깜절벽 꽝꽝 웅덩이 적막강산에 엎드려 만 번 절해라 그때처럼 잉잉거리게 햇빛이 벌 떼처럼 달겨들어 혼자 있는 겨울 유리창 으앙하고 또 한 아이 걸어 나오게 - 전달(傳達) - 하등 쓸모없는 감정이 많아 솔찬히 겪었는데도 여전히 그러니까 인간적이란 말은 고통을 함께 겪는 동지에게 위로를 건네는 말 태우고 남은 ..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남진우 - 도서관 유령 - 모니터를 보던 경비원도 잠이 들었다 깊은 밤 인적 끊긴 도서관 비스듬히 채광창으로 스며든 달빛이 열람실 바닥에 두텁게 쌓인 먼지를 쓸고 지나갈 때 서가에 꽂힌 책들이 하나 둘 날개를 펴고 허공 속으로 날아오른다 들어봐, 사각사각 종이 씹는 소리 도서관 유령들이 차례로 책을 먹어치우는 소리야 서가와 서가 사이를 너울대며 천장에서 벽으로 문에서 기둥으로 미끄러져 내리며 텅 빈 낭하 저편 울려 퍼지는 목쉰 소리 이 책은 너무 맛이 없어 하지만 저 구절은 먹을 만하군 이 대목은 베낀 게 틀림없어 쉴 새 없이 투덜거리다가 때로 입맛도 다시며 밤새도록 다다를 수 없는 한 문장을 찾아 서가를 뒤지고 다니는 도서관 유령들 숱한 사람들이 남긴 숱한 흔적이 서서히 구겨지고 버려지고 바스라진다 가루가 된..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이원 - 나는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 거울 속에 있으니 나는 거울의 몸이다 거울의 꿈이다 내가 제 몸이 되어도 꿈이 되어도 거울은 출렁이며 넘치지는 않는다 꿈은 보이지 않는 바닥이 바닥을 찾는 거울의 허공이 삼켰다 거울은 몸을 나누지도 않는데 내 꿈은 양쪽으로 벌린 두 팔을 접었다 폈다 한다 거울 속의 나는 딱딱한 거울이 아프지도 않다 거울의 구석에 있으니 나는 거울의 구석이다 거울이 벗어놓은 신발이다 내가 거울의 한쪽으로 밀려가 있으니 나는 거울의 벽이다 거울이 더 이상 파고들지 못하는 막다른 광장이다 내가 거울의 한가운데로 와있으니 나는 거울의 거울이다 거울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거울이 보인다 거울의 핵이 보인다 거울 속의 허공에 들어가 있으니 나는 허공의 몸이다 허공이 들여다보는 허공이다 허공이 지..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 대천바다 물 밀리듯 큰물이야 거꾸로 타는 은행나무야 - 그렇게 오는 사랑 있네 첫눈에 반하는 불길 같은 거 말고 사귈까 어쩔까 그런 재재한 거 말고 보고 지고 그립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대천바다 물 밀리듯 솨아 솨아아아아 온몸의 물길이 못 자국 하나 없이 둑방을 넘어 진액 오른 황금빛 잎사귀들 마지막 물기 몰아 천지사방 물 밀어가듯 몸이 물처럼 마음도 그렇게 너의 영혼인 내 몸도 그렇게 - 비밀 - 읽는 행위를 허락받지 못한 듯 조심스러워지는 그런 문자의 나열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지고 등줄기에 힘이 들어가는 금기의 서적을 펼쳐 잔뜩 긴장한 채 옹송그리며 비밀스러운 단어의 파도를 메마른 손으로 어루만지다 밖에서 들리는 작은 소음에도 화들짝 놀라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그런 언어를 찾아낼 때의 전율 ..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천양희 - 불멸의 명작 - 누가 바다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바닥부터 말하겠네 바닥 치고 올라간 물길 수직으로 치솟을 때 모래밭에 모로 누워 하늘에 밑줄 친 수평선을 보겠네 수평선을 보다 재미도 의미도 없이 산 사람 하나 소리쳐 부르겠네 부르다 지치면 나는 물결처럼 기우뚱하겠네 누가 또 바다에 대해 다시 말하라면 나는 대책없이 파도는 내 전율이라고 쓰고 말겠네 누구도 받아쓸 수 없는 대하소설 같은 것 정말로 나는 저 활짝 펼친 눈부신 책에 견줄 만한 걸작을 본 적 없노라고 쓰고야 말겠네 왔다갔다 하는 게 인생이라고 물살은 거품 물고 철썩이겠지만 철석같이 믿을 수 있는 건 바다뿐이라고 해안선은 슬며시 일러주겠지만 마침내 나는 밀려오는 감동에 빠지고 말겠네 - 색(色) - 진실이 새파랗고 거짓이 새빨갛단 말은 누가 ..
정말 이정록 - 갈대 - 겨울 강, 그 두꺼운 얼음종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 저 마른 붓은 일획이 없다 발목까지 강줄기를 끌어올린 다음에라야 붓을 꺾지마는, 초록 위에 어찌 초록을 덧대랴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일획도 없이 강물을 찍고 있을 것이지마는, 오죽하면 붓대 사이로 새가 날고 바람이 둥지를 틀겠는가마는, 무릇 문장은 마른 붓 같아야 한다고 그 누가 일필(一筆)도 없이 휘지(揮之)하는가 서걱서걱, 얼음종이 밑에 손을 넣고 물고기비늘에 먹을 갈고 있는가 - 삼만 - 잊히는 게 두려웠는데 내 기억의 안위를 먼저 살펴야 했다 어떤 것도 온전치 않다 온전(穩全)은 오만 기만 자만 삼만의 향연 낮에 생각한 시를 잊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정호승 - 벽 -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한때 벽 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 속의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 정말 부드럽다는 건 - 토마토를 구워보면 구울수록 더 부드러워져서는 눈물이 많아져요 구운 토마토를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이후의 모습들은 저렇게 무른 모습이 좋겠어요 생각들이 뜨거워지고 제 소리를 제가 알지 못하고 당신은 가방을 메고 종일 먼 곳을 헤매니 구운 토마토를 먹으면 눈가가 붉어져서는 문득 오래전 잊고 있던 내용을 돌아다볼 듯해요 제 안의 독소를 빼내주시니 우리, 단단함에 대해 적을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무너지도록 힘쓸 일이 없도록 아침엔 토마토를 구워요 당신을 당신 바깥으로 놓아보아요 - 파도 - 검은 파도가 구름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하나가 아닌 여러 갈래로 맞닿아 부비적댔다 밀어내는 형상으로 짐작건대 파도가 이겼다 부서진 구름송이들이 촘촘히 파도 새 스며들었다 둘은 하나가 되었다 자 이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