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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쓰기, 시싸우기

히스테리아 김이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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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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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는 일평생의 중반쯤 도달하면 최고의 맹수가 된다

눈 감고도 쏜살같이 먹이를 낚아챈다

그런 때가 오면 독수리는

반평생 종횡무진 누비던 하늘에서 스스로 떨어져

외진 벼랑이나 깊은 동굴로 사라진다

거기서 제 부리로 자신을 쪼아댄다

무시무시하게 자라버린 암갈색 날개 깃털을 뽑고

뭉툭하게 두꺼워진 발톱을 하나씩 하나씩 모조리 뽑아낸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며칠 동안 피를 흘린다

숙달된 비행을 포기한 채 피투성이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이제는 무대에 오르지 않는

아니

캐스팅도 안 되고 오디션을 보기도 어중간한 중년 여자 연극배우가 술자리에서 내게 들려준 얘기다

너무 취해서 헛소리를 했거나 내가 잘못 옮겼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냥 믿고 싶어서

경사가 급한 어두운 골목길 끝에 있는 그녀의 방까지

나는 바짝 마른 독수리 등에 업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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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오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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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빨강도 노랑도 아닌 애매한 오렌지

데굴데굴 굴러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양극단에 치우친 친구들은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해

이미 거리는 한참 벌어져 보이지 않는 너희가

중도에 머무르다 살아남기까지

이게 정답인 줄 알았어

 

방점을 찍고 싶다

그렇게 말했었는데

지금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