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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쓰기, 시싸우기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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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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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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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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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어느샌가

서로를 잊고

각자의 길을 간다

각자의 길을 갔다

 

희미하게 남은 자국을 문질러 닦아보다

그날 두고 왔던 운명의 부르짖음

너 아직 여기에,

넌 아직도 거기,

있었니

 

그래 나는 그동안 이렇게,

살아

살았어

다 안다고

더 말하지 말라고

그럴수록 나는 자꾸만

애틋하게 대한다

 

너와 나

우리 둘만 남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