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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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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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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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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
휘말리면
죽었다
눈뜨면
꿈처럼
살아서
되찾는 것
생의 그림에
물감을 덧대고
아직은 아니다
붓을 내려놓을 때가
쉬어가자
물의 색이 짙다
투명을 가져와
순수한 마음
주는 것
간밤에 푹 잤다
영혼은 지구를 한 바퀴 품고
어지러이 흩어진 마음을 모아
잔잔한 물결에 띄워보내
석양에 늘어진 그림자를
떼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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