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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쓰기, 시싸우기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이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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휙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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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 앞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입 안 가득 꽃잎을 물고

달리는 차를 보고만 있었는데 밟히는

아스팔트를 동정하고 있었는데 혁명이 내 정수리에

깃발을

꽂더니

빨간 불

인데도 길을 건너가버렸습니다 나는 따라

건너다가 신호등이 고장나

길 한가운데 노란 선을 밟고 섰는데

꽃잎을 웩웩 토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트럭 위입니다

트럭은 가만 있는데 세상이 휙휙 지나가면서 클랙슨을

울리고 욕을 해댔습니다 남자가 올라타 트럭을 몰고

그곳을 빠져나왔는데

그러고 보니 없습니다

뛰어내렸는지 내가 밀어냈는지 아니 내가 트럭을 버렸는지

나는 그냥 개흙탕물

옆에 섰습니다

아이가 하나

떠내려갑니다 할머니가 건져 올려

키웠습니다 나를 찾아와 니가 엄마냐 너도 엄마냐

할 것입니다 그때 할머니가 나타나

얘야, 가자 내가 에미다

할 것입니다

아이의 아장걸음이 나를 앞서갑니다 나는 마구 달렸습니다

넘어진 나를

시간이 밟고 갑니다 그리고 무언가 또 휙휙

지나가고 기억만 남았습니다

나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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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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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자

돌아갈 곳 없이 산 세월이 있는데

그 한마디에 눈물이 죽죽 흐른다

그 순간에는

영원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고

벅차오름을 꾹꾹 눌러 삼키기 바빠서

숨을 훅훅 끊어 쉬는 게 전부였다

이제는 내 집을 원한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데

이것도 욕심일까 없이 산 세월에 대한 보상을

욕심이라고 손쉽게 말해버리면

또 아물지 않은 생채기를 벌려내는 고통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무소유라면

그것과는 거리가 한참 먼 삶을

소유하고 싶은 나도 그들과 똑같다

특별하지 않다 특별하지 않음을 인정하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

손마디 뚝뚝 꺾어가며 세상아 덤벼라 내가 간다

무해한 용기를 짊어지다 그 무게에 질식하는 게

결코 답은 아니라고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는 건

특별하지 않아도 쓰임이 있을 거란

묵묵한 시간이 보장해 준 믿음이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