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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 대천바다 물 밀리듯 큰물이야 거꾸로 타는 은행나무야 - 그렇게 오는 사랑 있네 첫눈에 반하는 불길 같은 거 말고 사귈까 어쩔까 그런 재재한 거 말고 보고 지고 그립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대천바다 물 밀리듯 솨아 솨아아아아 온몸의 물길이 못 자국 하나 없이 둑방을 넘어 진액 오른 황금빛 잎사귀들 마지막 물기 몰아 천지사방 물 밀어가듯 몸이 물처럼 마음도 그렇게 너의 영혼인 내 몸도 그렇게 - 비밀 - 읽는 행위를 허락받지 못한 듯 조심스러워지는 그런 문자의 나열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지고 등줄기에 힘이 들어가는 금기의 서적을 펼쳐 잔뜩 긴장한 채 옹송그리며 비밀스러운 단어의 파도를 메마른 손으로 어루만지다 밖에서 들리는 작은 소음에도 화들짝 놀라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그런 언어를 찾아낼 때의 전율 ..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천양희 - 불멸의 명작 - 누가 바다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바닥부터 말하겠네 바닥 치고 올라간 물길 수직으로 치솟을 때 모래밭에 모로 누워 하늘에 밑줄 친 수평선을 보겠네 수평선을 보다 재미도 의미도 없이 산 사람 하나 소리쳐 부르겠네 부르다 지치면 나는 물결처럼 기우뚱하겠네 누가 또 바다에 대해 다시 말하라면 나는 대책없이 파도는 내 전율이라고 쓰고 말겠네 누구도 받아쓸 수 없는 대하소설 같은 것 정말로 나는 저 활짝 펼친 눈부신 책에 견줄 만한 걸작을 본 적 없노라고 쓰고야 말겠네 왔다갔다 하는 게 인생이라고 물살은 거품 물고 철썩이겠지만 철석같이 믿을 수 있는 건 바다뿐이라고 해안선은 슬며시 일러주겠지만 마침내 나는 밀려오는 감동에 빠지고 말겠네 - 색(色) - 진실이 새파랗고 거짓이 새빨갛단 말은 누가 ..
정말 이정록 - 갈대 - 겨울 강, 그 두꺼운 얼음종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 저 마른 붓은 일획이 없다 발목까지 강줄기를 끌어올린 다음에라야 붓을 꺾지마는, 초록 위에 어찌 초록을 덧대랴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일획도 없이 강물을 찍고 있을 것이지마는, 오죽하면 붓대 사이로 새가 날고 바람이 둥지를 틀겠는가마는, 무릇 문장은 마른 붓 같아야 한다고 그 누가 일필(一筆)도 없이 휘지(揮之)하는가 서걱서걱, 얼음종이 밑에 손을 넣고 물고기비늘에 먹을 갈고 있는가 - 삼만 - 잊히는 게 두려웠는데 내 기억의 안위를 먼저 살펴야 했다 어떤 것도 온전치 않다 온전(穩全)은 오만 기만 자만 삼만의 향연 낮에 생각한 시를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