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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한 사랑 노래 박혜경 이광호 엮음 - 너와 나 - 여기 이 벤치에 앉아 겨울 냄새를 맡고 있는 너와 나는 순간 스친 이 냄새에 말을 잃고 깊이 넓어져만 가는 너와 나는 너의 손을 잡지 못하는 나와 내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오는 너는 바람처럼 스산하고 공기처럼 맑아 떨어지며 정지하여 영원히 정지해버린 너는 그림처럼 아름답고 기억처럼 참담하여 내가 너의 아버지이기를 바라고 네가 나의 어머니이기를 바라는 너는 여기 추운 나무들이 서 있는 벤치에 앉아 희망한다. 한 아이가 다른 한 아이의 친구가 되지 말기를 한 여자가 한 남자의 애인이 되지 말기를 그래서 맑은 하늘과 비어 있는 거리 멈춰 선 버스와 흘러가는 시간 사이로 너의 두 눈은 그림처럼 아름다워 겨울 냄새를 풍기고 겨울의 하늘 속으로 멀어져 내가 빠져든 우물, 거울이 된다. _이철성, 『..
그림자를 마신다 이윤학 - 갈대 - 이제 제발 아픈 척하지 말자. 이제 제발 죄진 척하지 말자. 이제 제발 늙은 척하지 말자. - 유한(有限) - 컨디션 관리도 실력이라는 말 몸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 비로소 어려움을 실감한다 난이도는 해가 갈수록 상승하고 숙제처럼 해야 할 일이 쌓인다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한낱 인간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일 유한함을 흐르는 시간과 함께 체감하는 일 생과 사의 갈림길에선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 이 순간에도
꽃의 고요 황동규 - 슈베르트를 깨뜨리다 - 책꽂이 옥탑에서 책들 앞에 촘촘히 서서 살다가 책 뒤질 때 와르르 방바닥에 내리꽂힌 CD들 아 슈베르트 얼굴이나 이름이 적힌 판들. 이 한세상 살며 그래도 마음에 새길 것은 슈베르트, 고흐와 함께 보낸 시간에 새겨진 무늬들이라 생각하며 여태 견뎌왔는데. 껍질만 깨지지 않고 혹 속까지 상한 놈은 없는가 며칠 동안 깨진 사연을 하나씩 들어본다. 아니, 사연마저 깨진 맑음이다. 이틀 만에 듣는 폴리니가 두드리는 마지막 소나타는 맑음이 소리의 물결을 군데군데 지워 몇 번이나 건너뛰며 간신히 흘러간다. 뛸 때마다 마음도 건너뛰려다 간신히 멈춘다. 슈베르트여, 몸 뒤척이지 말라. 가만히 둘러보면 인간은 기실 간신히 깨지지 않고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시방 같은 봄 저녁 황혼이 어둠에 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