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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신용목 - 소사 가는 길, 감시 -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건너 다방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한 줄 비행기 지나간 흔적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 차창에도 다방 풍경이 비쳤을 터이니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져 있었다 머리 위로 바둑돌이 놓여지고 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 시인분류 - 시 쓰는 사람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제목을 정하고 쓰는 사람 쓰고 나서 제목을 정하는 사람 쓰던 도중 제목을 정하는 사람 제목을 정하지 않는 사람 이름을 붙이는 일이 쓰는 일보다 어려울 때가 있다
낮은 수평선 김형영 - 나의 시 정신 - 내가 살아서 가장 잘하는 것은 멍청히 바라보는 일이다. 산이든 강이든 하늘이든, 하늘에 머물다 사라지는 먹장구름이든, 그저 보이는 대로 바라보는 일이다. 한밤중 홀로 (깨어) 수곡지에 낚시를 드리우고 찌를 바라다보듯 그렇게 바라보는 일이다. 무슨 새가 울고 무슨 꽃이 피고 질 때도 그 이름 같은 건 기억하지도 않고 그냥 무심히 바라보는 일이다. 겨우내 땅속에 숨었던 생명들이 궁금해지면 봄비를 시켜 그 땅속 생명들을 불러내시는 하느님처럼 지난 기억들을 불러내어서는 마음벽에 걸어 놓고 또 그걸 한없이 바라보는 일이다. 아예 눈감고 누워 꾸벅꾸벅 졸듯이 바라보는 일이다. 그러다 어느 날 어딘지 거기 눈앞을 가리는 것들 사이사이로 나를 바라보는 내가 보이기라도 하면, 두렵고 부끄러워 그만 ..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이성미 - 휙휙 - 건널목 앞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입 안 가득 꽃잎을 물고 달리는 차를 보고만 있었는데 밟히는 아스팔트를 동정하고 있었는데 혁명이 내 정수리에 깃발을 꽂더니 빨간 불 인데도 길을 건너가버렸습니다 나는 따라 건너다가 신호등이 고장나 길 한가운데 노란 선을 밟고 섰는데 꽃잎을 웩웩 토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트럭 위입니다 트럭은 가만 있는데 세상이 휙휙 지나가면서 클랙슨을 울리고 욕을 해댔습니다 남자가 올라타 트럭을 몰고 그곳을 빠져나왔는데 그러고 보니 없습니다 뛰어내렸는지 내가 밀어냈는지 아니 내가 트럭을 버렸는지 나는 그냥 개흙탕물 옆에 섰습니다 아이가 하나 둘 셋 떠내려갑니다 할머니가 건져 올려 키웠습니다 나를 찾아와 니가 엄마냐 너도 엄마냐 할 것입니다 그때 할머니가 나타나 얘야, 가자 내가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