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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감정 최정례 - 겨울 유리창 - 그렇게도 부드럽게 목덜미에 그렇게도 다정하게 귓불에 그러다가 갑자기 낚아채듯 날렵하게 햇빛이 발꿈치를 햇빛이 발꿈치를 쫓아와 물어뜯어 몸을 피해도 쫓아오고 캄캄한 방에 갇혔는데도 햇빛이 하백의 딸 유화의 허벅지로 어찔어찔하게 햇빛과 자고 하백의 딸 닷 되들이만 한 알을 낳아 그 알을 내다 버려도 뭇짐승이 핥고 아지랑이의 깃털이 덮어주어 으앙하고 한 아이가 알에서 걸어 나왔듯 너 깜깜절벽 꽝꽝 웅덩이 적막강산에 엎드려 만 번 절해라 그때처럼 잉잉거리게 햇빛이 벌 떼처럼 달겨들어 혼자 있는 겨울 유리창 으앙하고 또 한 아이 걸어 나오게 - 전달(傳達) - 하등 쓸모없는 감정이 많아 솔찬히 겪었는데도 여전히 그러니까 인간적이란 말은 고통을 함께 겪는 동지에게 위로를 건네는 말 태우고 남은 ..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남진우 - 도서관 유령 - 모니터를 보던 경비원도 잠이 들었다 깊은 밤 인적 끊긴 도서관 비스듬히 채광창으로 스며든 달빛이 열람실 바닥에 두텁게 쌓인 먼지를 쓸고 지나갈 때 서가에 꽂힌 책들이 하나 둘 날개를 펴고 허공 속으로 날아오른다 들어봐, 사각사각 종이 씹는 소리 도서관 유령들이 차례로 책을 먹어치우는 소리야 서가와 서가 사이를 너울대며 천장에서 벽으로 문에서 기둥으로 미끄러져 내리며 텅 빈 낭하 저편 울려 퍼지는 목쉰 소리 이 책은 너무 맛이 없어 하지만 저 구절은 먹을 만하군 이 대목은 베낀 게 틀림없어 쉴 새 없이 투덜거리다가 때로 입맛도 다시며 밤새도록 다다를 수 없는 한 문장을 찾아 서가를 뒤지고 다니는 도서관 유령들 숱한 사람들이 남긴 숱한 흔적이 서서히 구겨지고 버려지고 바스라진다 가루가 된..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이원 - 나는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 거울 속에 있으니 나는 거울의 몸이다 거울의 꿈이다 내가 제 몸이 되어도 꿈이 되어도 거울은 출렁이며 넘치지는 않는다 꿈은 보이지 않는 바닥이 바닥을 찾는 거울의 허공이 삼켰다 거울은 몸을 나누지도 않는데 내 꿈은 양쪽으로 벌린 두 팔을 접었다 폈다 한다 거울 속의 나는 딱딱한 거울이 아프지도 않다 거울의 구석에 있으니 나는 거울의 구석이다 거울이 벗어놓은 신발이다 내가 거울의 한쪽으로 밀려가 있으니 나는 거울의 벽이다 거울이 더 이상 파고들지 못하는 막다른 광장이다 내가 거울의 한가운데로 와있으니 나는 거울의 거울이다 거울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거울이 보인다 거울의 핵이 보인다 거울 속의 허공에 들어가 있으니 나는 허공의 몸이다 허공이 들여다보는 허공이다 허공이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