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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 먹는 슬픔 유종인 - 가을 하늘 - 하늘이 더 깊어진 것이 아니다 눈앞을 많이 치운 탓이다 밥그릇처럼 뒤집어도 다 쏟아지지 않는 저 짙푸른 늪같이 떨어지는 곳이 모두 바닥은 아니다 열린 바닥이 끝없이 새떼들을 솟아오르게 한다 티 없다는 말, 해맑다는 말! 가을엔 어쩔 수 없다는 말, 끝 모를 바닥이라는 말! 바닥을 친다는 것, 고통을 저렇게 높이 올려놓고 바닥을 친다는 것 그래서, 살찌고 자란다는 것! 당신이 내게 올 수도 있다는 것 변명은 더 이상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 - 왜 - 내가 왜 좋아? 발가락이 귀여워서 내가 왜 좋아? 대화가 잘 통해서 내가 왜 좋아? 예술을 사랑해서 내가 왜 좋아? 아는 게 많아서 내가 왜 좋아? 향기로워서 내가 왜 좋아? 찌질해서
거미는 이제 영영 돼지를 만나지 못한다 김중 - 세바스토폴 거리의 추억 - 태엽이 돌아가면서 인형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은밀한 회상 속으로 나는 끌려 들어갔다 바이올린은 높은 도에서 온종일 떨었고 흰 머리칼 휘날리며 빨간 눈을 치켜뜨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두근두근 저주해, 사랑해, 저주해…… 끝없음과 끝없음이 지상을 스쳐 잠시 만날 때 빛이 끌어내는 색깔의 형식으로 신음하는 사물들 어둠 속에 뿌리내린 식물들의 신성한 마비와 심연 위에 펼쳐지는 미로의 얼굴, 얼굴들 우리는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법은 알지만 그 끝이 무언지 결코 모르지 않던가? 시를 읽으면, 앉은뱅이 벌떡 일어나고 시를 읽으면, 광인이 맑은 눈빛으로 엉엉 울고 시를 읽으면, 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나, 일곱 원소로 분해되어 이렇게 당신 눈꺼풀에 매달려 있는데…… ..
이 달콤한 감각 배용제 - 노을 - 사라진 것이 아니다 해가 질 때 지상의 먼지들이 붉게 타오르는 건 아직 뜨거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먼지들의 혈맥 속에 진한 피가 돌고 있기 때문이다 소멸을 위한 춤이 아니다 무거운 형체를 꺼내놓고 잠시 한때의 가벼움을 향하여 제사를 올리는 것, 환생의 사원에 들러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다, 고 믿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종교를 나는 믿는다 - 길 - 언어적 표현의 한계를 느꼈을 때 나는 이 길을 걸어도 될까 고민했다 그런데 지금은 오직 길이 이것뿐이란 생각이다 사람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져 특별하기 보다 소소한 일상에 가깝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또 있는지 궁금해 여러 낱장을 뒤적이고 들춰보지만 대개 비슷한 소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