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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아 김이듬 - 독수리 시간 - 독수리는 일평생의 중반쯤 도달하면 최고의 맹수가 된다 눈 감고도 쏜살같이 먹이를 낚아챈다 그런 때가 오면 독수리는 반평생 종횡무진 누비던 하늘에서 스스로 떨어져 외진 벼랑이나 깊은 동굴로 사라진다 거기서 제 부리로 자신을 쪼아댄다 무시무시하게 자라버린 암갈색 날개 깃털을 뽑고 뭉툭하게 두꺼워진 발톱을 하나씩 하나씩 모조리 뽑아낸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며칠 동안 피를 흘린다 숙달된 비행을 포기한 채 피투성이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이제는 무대에 오르지 않는 아니 캐스팅도 안 되고 오디션을 보기도 어중간한 중년 여자 연극배우가 술자리에서 내게 들려준 얘기다 너무 취해서 헛소리를 했거나 내가 잘못 옮겼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냥 믿고 싶어서 경사가 급한 어두..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 - 청혼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사랑의 모양 -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집중하면 많은 것이 보인다 보이지 않음에서 보이는 것을 찾는다 대놓고 사랑한다 말하는 덤덤함과 담백함 사이의 어떤 음성보다 그 마음이 너무나도 가엾고 소중해 감히 꺼..
친애하는 사물들 이현승 - 누아르 - 끈끈함이란 파리들의 우정이네 같이 밑바닥을 기어본 자들의 것이지 날개가 피부든 손톱이든 간에 그 날갯짓이 경박하든 말든 그것은 떠오르는 데 도움이 되네 밑바닥 생활을 벗어나면 곧장 천상인 듯 날갯소리 힘차지만 한낱 파리 날개일지라도 누가 먼저 비상할 때 위험해지는 것이 바닥의 생리라네 바닥을 벗어나면 다른 바닥이 기다릴 뿐 껌딱지처럼 질기게 들러붙은 것이 밑바닥이지 호구에는 천상 고단함이 따르고 피곤은 업종을 가리지 않네 떼인 돈을 받으러 다니거나 밤길 조심해라 딸 예쁘더라 언뜻 들으면 어머니 말씀 같지만 한번 들으면 문신처럼 새겨지는 말들도 곧잘 한다네 상스러움과 불량기가 필수인 이 장르에서 중요한 것은 리듬인데 어딘지 뽕짝스러운 리듬은 건달들의 걸음걸이에 녹아 있고 흉터투성이의 순정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