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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쓰기, 시싸우기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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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불(着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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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나는 착불로 왔다
누가 지불해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어서
내가 나를 지불해야 한다
삶은 매양 가벼운 순간이 없어서
당나귀 등짐을 지고
번지 없는 주소를 찾아야 했다
저녁이면 느닷없이 배달 오는 적막들
골목에 잠복한 불안
우체국 도장 날인처럼 쿵쿵 찍혀오는
살도록 선고유예 받은 날들
물건을 기다리는 간이역의 쪽잠 같은 꿈이
담벼락에 구겨 앉아 있다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으로
이 세상에 온 대가를 지불하고
빗방울은 가문 그대 마음을 적시는 것으로
저의 몫을 다한다
생이여!
나는 얼마나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야
나를 지불할 수 있는가
얼마나 더 울어야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모든 날들은 착불로 온다
사랑도 죽음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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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先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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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선불이었다면
가격은 누가 정해주었나
날 때부터 꼬리표 달랑
천지 간 무서움 모르고
경거망동
살도록 선고받은 날들
이미 치러진 잔치는
언제 끝나는지
지나가는 건 무겁고
지불한 이는 대답 없고
 
내 정신 좀 봐
그건 이전 삶의 무게
비정한 이는 알지 못해도
세상의 기준은 몸서리치는 그날에
피부에 새겨진
아름다움을 누가 지불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