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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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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이병률 - 찬란 -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병률 - 왜 그렇게 말할까요 - 우리는, 우리는 왜 그렇게 말할까요 그렇게 말한 후에 그렇게 끝이었다죠 그 말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니 절대 겹치거나 포개놓을 수 없는 해일이었다지요 우리는 왜 그렇게 들어놓고도 그 말이 어떤 말인지를 알지 못해 애태울까요 왜 말은 마음에 남지 않으면 신체 부위 어디를 떠돌다 두고두고 딱지가 되려는 걸까요 왜 스스로에게 이토록 말을 베껴놓고는 뒤척이다 밤을 뒤집다 못해 스스로의 냄새나 오래 맡고 있는가요 잘게 씹어 뼈에 도달하게 하느라 말들은 그리도 억센가요 돌아볼 일을 만드느라 불러들이는 말인가요 대체 그 말들은 어찌어찌하여 내 속살에다 바늘과 실로 꿰매 붙여 남겨놓는단 말인가요 - 알아 - 그 왜 십수 년도 전에 내가 했던 말 있잖아 그거 사실 후회해 그때는 몰..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이병률 - 오시는 마을 - 새로 지은 마을로 사람들이 이사를 합니다 마을 입구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생각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둥근 마을의 경계에는 화살나무를 둘러 심고 유성이 도착하도록 꽃밭을 파놓습니다 상자에 담아온 시간들은 천천히 씻겨도 좋을 것입니다 어느 저녁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합니다 분수대를 가운데 둔 듯 동그랗게 모여 앉았습니다 소개는 즉흥적이며 아무도 질문하지 않습니다 데인 자국을 이야기하는 사람 물에 휩쓸린 기억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두 바퀴의 소개가 돌았지만 자신의 깊숙한 곳까지를 소개하느라 생각의 면적을 줄이기 위해 계절을 하나로 통일시키자는 안건은 모두 잊은 듯합니다 함부로 내일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무서워할 것들을 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