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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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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김점용 - 허공 길 -꿈64 - 커다란 벽화를 그린다 다른 누군가는 반대쪽에서 그린다 그는 어린시절의 나다 구름이 지나가면서 내 그림을 지운다 내 짚신이 반대쪽의 그림을 지운다 내가 다른 귀퉁이에서 그리기 시작하자 아이도 반대편에서 붓을 놀린다 거대한 바퀴, 윤회를 그리고 있단다 그제야 걸개그림은 원래 완성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벽이 허공에 붕 떠 있고 아래쪽을 보니 줄사다리가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다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끌어왔는가 눈뜰 수 없는 유년의 눈부신 물결인가 몇 줄 경전의 달콤함인가 야곱의 사다리는 말씀에 닿았는데 나는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올랐는가 세상은 모두 저 아래 호수에 잠들었는데 때론 수정처럼 맑은 얼음 기둥을 타고 아득한 공중에 발 딛고 서서 낚시를 하다가 그대로 얼어붙는 꿈 그때 누군..
메롱메롱 은주 김점용 - 감자꽃 피는 길 - 내가 아직 너의 문간에 이르지 못했으니 이곳에서 그냥 밤을 새우고 말리라 오늘 하루 얼마나 걸었을까 지는 해의 부르튼 발바닥이 보여 문을 잠근 그대여 너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을 테지 이 길의 두근거림 가도 가도 계속되는 흰 꽃들의 속삭임 가만히 주저앉아 쓰다듬어보면 종일 햇볕이 데우지 않았어도 수많은 발길로 뜨거워진 길 긴 가뭄에도 땅속으로 뻗는 저 알알의 힘 너는 아직 모르고 있을 테지 간간이 한 줌의 굴욕 한 줌의 신산한 기억들도 흰 감자꽃 속에 널브러져 있지만 길을 따라 아름답게 늙어가는 사람들 너는 아직 손잡아보지 못했을 테지 문을 잠근 그대여 나는 아네 언젠가 내가 너의 문간에 이르렀을 때 너무 단단히는 잠그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삐걱거려주리라는 것을 끝끝내 열리지 않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