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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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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책 남진우 - 타오르는 책 -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남진우 - 도서관 유령 - 모니터를 보던 경비원도 잠이 들었다 깊은 밤 인적 끊긴 도서관 비스듬히 채광창으로 스며든 달빛이 열람실 바닥에 두텁게 쌓인 먼지를 쓸고 지나갈 때 서가에 꽂힌 책들이 하나 둘 날개를 펴고 허공 속으로 날아오른다 들어봐, 사각사각 종이 씹는 소리 도서관 유령들이 차례로 책을 먹어치우는 소리야 서가와 서가 사이를 너울대며 천장에서 벽으로 문에서 기둥으로 미끄러져 내리며 텅 빈 낭하 저편 울려 퍼지는 목쉰 소리 이 책은 너무 맛이 없어 하지만 저 구절은 먹을 만하군 이 대목은 베낀 게 틀림없어 쉴 새 없이 투덜거리다가 때로 입맛도 다시며 밤새도록 다다를 수 없는 한 문장을 찾아 서가를 뒤지고 다니는 도서관 유령들 숱한 사람들이 남긴 숱한 흔적이 서서히 구겨지고 버려지고 바스라진다 가루가 된..